- 소멸시효 관련 주요 판례 변경
최근 대법원이 채권의 소멸시효에 관해 기존의 입장을 변경한 새로운 판결(대법원 2025. 7. 24. 선고 2023다240299 전원합의체 판결)을 하여, 이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위 판결이 있기 전까지는, 채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뒤에도 채무자가 채무를 일부라도 갚거나 승인하면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완성에 따른 이익(‘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해 왔습니다. 즉, 채무의 소멸시효가 지난 뒤에도 채무자가 그 채무를 일부라도 갚았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나머지 채무도 갚아야 한다고 보아 왔습니다. 이번 판결은 이러한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기존의 법리를 폐기한 것입니다.
이번 판결에 따라, 이제부터는 채무자가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무를 일부 갚을 경우 나머지 채무도 갚아야 하는지는, 채무자가 채무를 일부 갚을 때 소멸시효를 주장할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는 개별 사안에 따라 구체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 사안과 쟁점
대법원이 지난 50년간 유지해 왔던 판례를 변경한 것이 실제 사안에서 어떻게 적용될지를 이해하기 위해, 위 판례에서 문제된 사건의 사실관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문제의 대상 사건은 이른바 ‘배당이의 사건’입니다.
먼저 당사자들 사이의 채권채무관계를 보면, 채무자 甲이 乙에게 4차례에 걸쳐 총 2억 4000만 원을 빌렸는데, 이후 1·2차 차용금의 이자 채무는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더 이상 갚을 의무가 없어졌습니다. 이후 甲은 乙에게 어떤 차용금에 대한 변제인지를 특정하지 않은 채 채무의 일부변제로 1800만 원을 지급했습니다.
다음으로 배당관계를 살펴보면, 甲 소유의 부동산이 경매절차에 들어가, 乙은 근저당권자로서 채권원리금으로 약 4억 6000만 원을 배당 받았습니다. 이에 甲은 시효로 소멸된 채권은 고려하지 않은 채 乙에게 실제 채권액보다 과다하게 배당했다며 배당표를 정정해 달라며 배당이의 소송을 제기한 사건입니다.
위 사건에서 일부 이자채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는지, 또 그러한 시효이익이 일부 변제로 포기된 상태인지 여부가 문제되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기존의 대법원 판례를 원용하여 “甲이 1·2 차용금 이자 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차용금을 일부 변제함으로써 1·2차 차용금 이자 채무에 관한 소멸시효 완성의 이익을 포기했다”고 판단하여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甲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배당이 정당했다는 판결입니다.
기존 대법원 판례(1966다2173 판결 등)에서는 “시효완성 뒤 채무자가 채무를 승인하면,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채무자가 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변제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 채무를 일부라도 갚았다면 완성된 시효이익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는 것으로 추정하는 법리입니다.
- 대법원(전원합의체) 판단의 논거
위 기존 판례를 변경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는, 소멸시효완성 후 채무 일부를 변제했다고 해서 곧바로 시효이익의 포기 의사가 표시된 것으로로 볼 수 없다며 원심을 파기환송하였습니다. 이러한 판결의 결론에는 대법관 전원이 이의 없이 일치된 의견이었으나, 결론에 이르는 법리의 구성에서는 이론을 제기하는 별개의견이 있었습니다. 법리적 쟁점은 기존 판례가 인정해온 추정의 법리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폐기할 것인지에 관한 입장만 달리한 것입니다. 이에 관한 다수의견과 별개의견의 논리적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수의견의 논거
다수 의견은 추정 법리는 경험칙에 근거한 논리인데, 채무승인에 기해 시효이익의 포기를 추정하는 것은 오히려 경험칙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즉 소멸시효 기간이 지났다는 사정만으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는지 여부는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그 주장의 실질적인 내용은 종전 대법원 판례에서 추정의 법리에 관한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추정을 번복하는 기존의 대법원 판례의 논리를 그대로 원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채무자가 시효완성으로 채무에서 해방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그 이익을 포기하고 채무를 부담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고, 오히려 경험칙에 비추어 보면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는 행위의 법률적 성격이 엄격히 다른 행위라는 점도 지적합니다. 특정 행위가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 행위와 법적 성격이 전혀 다른 의사표시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채무승인은 단순히 채무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표시하는 행위로, 그 행위로 인해 의사와 상관없는 시효중단의 효력이 발생하는 준법률행위이지만, 시효이익 포기는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한 법적 이익을 스스로 받지 않겠다는 효과의사에 따라 시효완성 이익이 소멸하는 법률행위이므로 이러한 두 행위의 성격은 명확히 다릅니다. 이러한 기본적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채무승인 행위(민법에서는 시효중단 사유로만 규정하고 있음)가 있으면 곧바로 시효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가 있다고 추정하는 종전 판례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다수의견은 추정의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 행위만을 근거로 채무자에게 중대한 불이익을 가져오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까지 손쉽게 추정하고 있는데, 권리나 이익의 포기에 관한 해석은 엄격히 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의 일반 원칙과 부합하지 않다는 점, 이러한 추정이 사실의 추정이므로 반증에 기해 번복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사실심의 문제일 뿐 법률심에서 그 정당성 여부를 번복하기는 어려워 부당한 사실인정에도 권리구제에는 난점이 있다는 실무관행상 문제점이 있다는 점도 보충의견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 별개 의견
별개 의견은 다수 의견과 달리 종전 판례가 오랜 기간 적용해온 추정의 법리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즉 원심판결 중 제1, 2차용금 이자채무에 관한 판단 부분에서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는 다수 의견의 결론에는 동의하지만, 추정법리에 관한 판례 변경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별개 의견은 추정 법리의 근거인 경험칙이 명백히 잘못되었다거나 사회일반의 상식에 반한다고 볼 만한 자료는 없다고 주장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타당성이 인정되고 적용해 온 추정의 법리는 여전히 유지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추정의 법리를 폐기한 일본의 경우에도 신의칙을 적용하여 추정의 법리가 있는 것과 유사한 결론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는 점도 지적하며, 추정 법리가 채무자를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하거나 부당한 결과를 야기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즉 종전 판례를 유지하고 구체적 타당성은 철저한 심리로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별개의 문제라는 입장입니다.
- 정리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 후 채무를 승인했더라도, 그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고 추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상식에 부합한다는 점, 판례의 추정 법리에 강한 사실인정의 기속력이 있어 진실에 부합한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음에도 쉽게 추정의 법리를 적용하게 되면 실체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부당한 결론을 양산할 위험도 있다는 점 등, 여러 문제점에 비추어 볼 때, 대법원의 이번 판례 변경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된 사안과 같이 소멸시효가 지난 뒤, 채무자가 일부 변제나 유사한 행동을 했을 때, 종전 판례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이를 시효완성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해 왔지만, 실제로는 시효기간이 끝난 채무를 되살리는 건 시효제도의 취지에 반하고 또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몰랐다는 점을 입증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서(부재증명의 난점) 채무자가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불합리한 사례도 많다는 점을 감안해 보아야 합니다.
게다가 실제로 종전 판례의 법리를 악용한 일부 추심업체(사채업체)에서 채무자에게 수차 위협적인 독촉을 하다가 상환유예나 이자감면을 미끼로 시효 완성된 채권이라고 특정하지도 않은 채 일부 채권을 변제 받고는, 이후 태도를 돌변하여 채무자가 시효이익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전액을 갚아내라고 몰아가는 등 실무상 악용 사례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면 이번 판례변경은 채무자 보호 측면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할 것입니다.
한편 채권자 입장에서는 채무자가 분명한 입장을 표명했음에도 부당히 시효이익 포기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부당한 사태에 대해서는 신의칙에 기하여 시효항변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실 인정을 형식적인 추정의 법리와 틀에 묶어 둘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구체적 타당성은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